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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십일조는 없다?

십일조는 없다?

 

요즈음 교회 안팎으로 십일조가 큰 이슈가 되고 있으며, 십일조 폐지론을 주장하는 사람들과 교회들이 점점 늘어가는 추세인 듯하다. 십일조 폐지론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정말로 십일조는 더 이상 우리와 상관이 없는 것일까? 십일조는 신학적으로 정당하지 못한 것인가? 구약성경 말라기서는 십일조를 강조하는 것이 아닌데 목회자들이 교세를 무리하게 확장하기 위한 자금 운용의 수단으로 순진한 교인들을 현혹시키기 위해 교묘히 설교에 이용하는 본문인가? 만약에 그것이 사실이라면 그것은 대단히 위험천만한 일이 될 것이고, 그렇게 목회하다가는 결국 돌이킬 수 없는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게 될 것이다. 다음과 같은 주님의 말씀들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사람은 그 누구도 없기 때문이다.

 

(요 16:2) 『사람들이 너희를 출회할 뿐 아니라 때가 이르면 무릇 너희를 죽이는 자가 생각하기를 이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예라 하리라』

 

주님께서 그의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이 구절은 장차 신실한 하나님의 사람들을 공격하며 죽이기까지 하는 미련하고 악한 사람들이 일어나게 되는데, 그들은 자신들이 그러한 악한 도구로 쓰임받으면서도 정작 그 자신들은 지금 하나님을 섬기는 예를 행하고 있다는 착각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마 7:21-23) 『[21]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22]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23]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계 22:18-19) 『[18] 내가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을 듣는 모든 사람에게 증언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두루마리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것이요 [19] 만일 누구든지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두루마리에 기록된 생명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여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

 

(약 3:1) 『내 형제들아 너희는 선생된 우리가 더 큰 심판을 받을 줄 알고 선생이 많이 되지 말라』

 

이상과 같은 측면에서 우리의 일거수 일투족이 얼마나 중차대한 것들인지... 그러한 측면에서 목회자로서, 설교자로서, 집필가로서의 사역을 한다는 것이 문득 문득 가슴 떨린다.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아무리 많은 사역, 큰 사역들을 감당했을지라도 불법을 행하는 자들은 결국 주님을 떠나가야 할 것이라고 경고하셨기 때문이다. 그런 측면에서 보자면 우리가 다루는 하나하나의 주제는 그 어떤 것도 결코 작고 가벼운 문제일 수가 없는 것이리라. 그렇다고 해서 안전하기 위해 아무것도 안하는 것은, 한 달란트를 받고도 주인을 굳은 사람으로 알고 두려워하여 그것을 땅에 묻고는 아무 것도 안하다가 결국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 심판받고 바깥 어두운 데로 쫓겨나 슬피울며 이를 갈게 되는 어리석은 종처럼(마25:24-30), 100% 저주와 심판을 보장하는 더 어리석고 악한 것임을 알기에 오늘도 가슴 떨림으로 성령님을 의지하며 한 걸음 한 걸음 조심스럽게 전진해 가는 사람들이 목회자요 주의 종들이 아니던가! 성령님! 진리 가운데 행할 수 있도록 도와주옵소서!

 

I. 십일조는 신학적으로 정당하지 못한 것인가?

 

1. 십일조는 전 인류의 공통된 유산이다.

 

《종교와 윤리 대백과사전》에 따르자면, 십일조 현상은 히브리민족에게만 있는 독특한 것이 아니었고, 전 세계 각국에서 오랜 역사에 걸쳐 널리 행해지고 있었다. 이 말은 십일조가 히브리인들과 같은 어느 한 민족 혹은 한 경전에만 등장하는 독특한 개념이라기보다는, 태초로부터 시작된 전 인류의 공통된 유산이라는 말인 것이다.

 

모든 인류의 조상이 아담과 하와를 거쳐 노아라고 하는 성경의 진리가 전 세계 고대문명의 흔적에서 발견되는 것과 비슷한 맥락인 것이다. 모든 고대문명의 역사에서 홍수에 대한 전설을 찾아볼 수 있으며, 중국, 뉴질랜드 마오리족, 호주 원주민 등에는 홍수 전설이 내려오고 있고, 특히 니느웨에서 발견된 바벨론의 길가메쉬 서사시나 미국 미시간 주에서 발견되는 오래된 인디언의 석판 등에는 노아의 홍수가 자세히 묘사되어 있음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들이다. 노아의 후손들의 이름이 도시나 국가, 민족의 이름으로 사용되고 있다.

 

특히 상형문자를 사용하고 있는 중국의 경우에, 배를 나타내는 “선(船)”자는 배를 나타내는 “주(舟)”자와 여덟을 나타내는 “팔(八)”자와 사람의 입을 나타내는 “구(口)”자가 합쳐져서 된 말인데, 이는 성경에 나오는 노아의 여덟 식구가 방주를 타고 홍수를 피하여 살게 되었다는 기사를 연상케 하며, 또 그들의 홍수전설에 의하면 모든 중국인들은 대홍수를 극복함으로써 이름을 떨친 옛 선조는 '누와'였다고 한다. 이 외에도 성경의 기록과 일치되는 많은 것들이 전 세계 고대문명의 흔적들에서 많이 발견되고 있음을 본다.

 

십일조는 모든 인류의 유산이지 어느 한 민족 혹은 어느 한 경전에만 기록된 독특한 가르침이 아니다. 다시 말해서 십일조의 기원은 첫 사람 아담과 하와로부터 기인된 것이고 그것이 전 세계에 구전으로 전승되어져 내려간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물론 아담과 하와의 타락 이후에 제사의 문제가 생겼으며 그 제사를 집전할 제사장이 있어야 했고 그 제사장의 사역을 위한 물질로서의 십일조가  필요해졌을 것이다(민18:21,참조). 실제로 아브라함에게 십일조를 받았던 멜기세덱은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었다고 성경이 말씀하고 있기 때문이다(창14:18). 그렇기에 모세의 율법이 기록되기 훨씬 이전 시대 사람인 아브라함과 야곱이 이미 십일조를 드리고 있었다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음을 본다(창14:17-20;창28:20-22). 십일조는 모세에 의해 율법으로 새롭게 제정된 것이 아니라, 아담과 하와의 타락 이후, 이미 시작된 인류문명의 한 부분이라는 말이다. 예수님의 다음과 같은 말씀도 그런 맥락에서 이해되어져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마 21:33-43) 『[33] 다른 한 비유를 배우라 한 집 주인이 포도원을 만들어 산울타리로 두르고 거기에 즙 짜는 틀을 만들고 망대를 짓고 농부들에게 세로 주고 타국에 갔더니 [34] 열매 거둘 때가 가까우매 그 열매를 받으려고 자기 종들을 농부들에게 보내니 [35] 농부들이 종들을 잡아 하나는 심히 때리고 하나는 죽이고 하나는 돌로 쳤거늘 [36] 다시 다른 종들을 처음보다 많이 보내니 그들에게도 그렇게 하였는지라 [37] 후에 자기 아들을 보내며 이르되 그들이 내 아들은 존대하리라 하였더니 [38] 농부들이 그 아들을 보고 서로 말하되 이는 상속자니 자 죽이고 그의 유산을 차지하자 하고 [39] 이에 잡아 포도원 밖에 내쫓아 죽였느니라 [40] 그러면 포도원 주인이 올 때에 그 농부들을 어떻게 하겠느냐 [41] 그들이 말하되 그 악한 자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은 제 때에 열매를 바칠 만한 다른 농부들에게 세로 줄지니이다... [43]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의 나라를 너희는 빼앗기고 그 나라의 열매 맺는 백성이 받으리라』

 

모세에 의해 기록된 오경에 보면 인류의 시조 아담과 하와의 자녀들인 가인과 아벨이 하나님께 똑같이 제사를 드렸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제물을 삼아 드렸던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제사 드렸던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않으셨다.

 

(창 4:3-5) 『[3]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4]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5]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가인과 아벨 두 사람이 모두 동일한 시간에 동일한 제사를 드렸는데, 어찌하여 하나님께서는 아벨 한 사람의 제사만 받으셨던 것일까? 동일한 모세의 오경인 레위기 27장의 다음 구절들을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레 27:26-33) 『[26] 오직 가축 중의 처음 난 것은 여호와께 드릴 첫 것이라 소나 양은 여호와의 것이니 누구든지 그것으로는 성별하여 드리지 못할 것이며... [30] 그리고 그 땅의 십분의 일 곧 그 땅의 곡식이나 나무의 열매는 그 십분의 일은 여호와의 것이니 여호와의 성물이라 [31] 또 만일 어떤 사람이 그의 십일조를 무르려면 그것에 오분의 일을 더할 것이요 [32] 모든 소나 양의 십일조는 목자의 지팡이 아래로 통과하는 것의 열 번째의 것마다 여호와의 성물이 되리라 [33] 그 우열을 가리거나 바꾸거나 하지 말라 바꾸면 둘 다 거룩하리니 무르지 못하리라』

 

아벨의 제사장면을 기록한 동일한 모세가 이 구절을 기록한 것임에 주목해야 한다. 그런 시각으로 볼 때, 아벨이 드렸던 양의 첫 새끼는 궁극적으로 십일조와 연관된 것이었다.

 

가인과 아벨 두 사람이 모두 동일한 시간에 동일한 제사를 드렸는데, 어찌하여 하나님께서는 아벨 한 사람의 제사만 받으셨던 것일까? 이번에는 히브리서 기자를 통해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주목해 보자.

 

(히 11:4)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언하심이라 그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지금도 말하느니라』

 

이상의 구절을 볼 때 아벨의 제물은 믿음과 연관된 것이었다.

그렇다면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믿음이란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아벨의 제사가 믿음으로 드려졌기에 하나님께서 그 예물을 받으셨다고 기록하고 있는 이 히브리서 11장의 기록들을 잘 살펴보면 그 믿음이 무엇인가를 쉽게 알 수 있다. 히브리서 11장, 본장에 따르면 어떤 사람에게 하나님의 어떤 약속, 혹은 어떤 명령이 주어지고, 그 사람이 하나님의 그 약속이나 그 명령에 순종하는 것이 믿음임을 알 수 있게 된다. 그런 차원으로 보자면 아벨이 하나님께 믿음으로 제사를 드렸다는 이야기는 하나님의 어떤 약속 혹은 어떤 명령이 아벨에게 있었고, 아벨이 그 약속 혹은 명령에 순종하여 예물을 드렸다는 말이 되는 것이다. 십일조는 ‘첫 열매’의 특별한 형태(레 27:26-33), 혹은 “처음 익은 것과 십일조를 모든 밭에서 거두어”(느12:44)라는 개념에서 볼 때, 아벨이 바친 양의 첫 새끼는 십일조 혹은 십일조와 함께 드려졌던 예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2. 말라기의 십일조는 누구에게 무엇을 경고하는 것인가?

 

구약의 마지막 책인 말라기서는 과연 누구를 위한 책이며 무엇을 책망하며 경고하는 책인가? 말라기서는 “제사를 잘못 드리고 있는 제사장들에게만 국한되는 책망과 경고”인가? 혹은 “제사장들에 대한 책망과 경고이지만 동시에 하나님의 백성들 전체에 대한 책망과 경고”인가?

 

이 문제에 대하여 치열한 논쟁의 공방이 벌어지고 있음을 본다.

 

십일조의 폐지를 외치는 부류들은, 말라기서란 제사를 잘 못 드리고 있는 제사장들에 대한 책망과 경고인데 그러한 문맥과 상관없이 말3:8-10을 인용하여 교인들에게 십일조를 절대적인 것으로 믿게 만들었고 기복신앙과 맞물려 증폭시켰다는 주장을 펼치고 있으며 정직한 목회자는 십일조를 강조하면 안 되는 것이며, 십일조 없는 교회가 좋은 교회라는 주장을 펼쳐 나간다. 하지만 그것이 과연 성경적으로 맞는 말일까?

 

아니다. 절대 그렇지 않다고 본다.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다.

 

(말 1:1) 『여호와께서 말라기를 통하여 이스라엘에게 말씀하신 경고라』

 

※ 이 전제와 같이 말라기서 전체는 제사장을 포함한 이스라엘 백성 전체를 향한 경고였지 제사장들 혹은 이스라엘 백성들 중 어느 한쪽에만 주는 경고가 아니었다.

 

말1:2-5은 여호와하나님은 이스라엘 전체를 사랑하시지만 에서 즉 에돔족속들과 같이 교만한 자들에게는 영원한 진노를 베푸신다는 전체적인 경고다.

 

말1:6-9은 하나님의 이름을 멸시하는 제사장들에 대한 책망과 경고다.

 

말1:10-14은 형식적인 제사와 온전치 못한 예물을 드리는 이스라엘백성들에 대한 책망과 경고다.

 

“...너희가 또 말하기를 이 일이 얼마나 번거로운고 하며 코웃음치고 훔친 물건과 저는 것, 병든 것을 가져왔느니라 너희가 이같이 봉헌물을 가져오니 내가 그것을 너희 손에서 받겠느냐 이는 여호와의 말이니라 짐승 떼 가운데에 수컷이 있거늘 그 서원하는 일에 흠 있는 것으로 속여 내게 드리는 자는 저주를 받으리니...”(13-14절)

 

※ 제사를 드리는 것은 제사장들이지만 그 제물을 가져오는 것은 백성들이기 때문이다.

 

말2:1-9은 타락한 제사장들에 대한 책망과 경고다.

 

말2:10-17은 제사장들을 포함한 이스라엘백성 전체를 향한 책망과 경고다.

 

“우리 각 사람이... 유다는... 이스라엘과 예루살렘 중에서는... 제사를 드리는 자도... 너희의 봉헌물을 돌아보지도 아니하시며...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가 이르노니...”

 

말3:1-6미래에 대한 예언으로 메시야에 관한 약속을 그 배경으로 하고 있다.

 

말3:7-12이스라엘백성 전체를 향한 책망과 경고이며 부흥으로의 촉구이다.

 

너희 곧 온 나라가 나의 것을 도둑질하였으므로 너희가 저주를 받았느니라... 너희 토지 소산... 너희 밭의 포도나무 열매가... 너희 땅이 아름다워지므로...”(9,11,12절)

 

※ 제사장들은 밭이나 땅을 기업으로 소유하지 않는다(민18:24). 다시말해 이 구절들은 이스라엘 백성 전체를 향한 책망과 경고이지 단지 제사장들의 직무유기 혹은 도둑질을 책망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이야기이다.

 

(말 3:9-12) 『[9] 너희 곧 온 나라가 나의 것을 도둑질하였으므로 너희가 저주를 받았느니라 [10]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들)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부족함이 없도록/직역) 붓지 아니하나 보라 [11]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메뚜기를 금하여 너희 토지소산을 먹어 없애지 못하게 하며 너희 밭의 포도나무 열매가 기한 전에 떨어지지 않게 하리니 [12] 너희 땅이 아름다워지므로 모든 이방인들이 너희를 복되다 하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 이것은 이스라엘백성 전체에 관한 경고이자 부흥으로의 촉구인 것이다.

 

[참고적으로, 혹자는 히브리원문에 말3:8에 ‘하나님의 것’이니 ‘나의 것’이니 ‘주의 것’이니 하는 문구가 없으며 그런 식의 번역이 십일조와 관련하여 오해가 더욱 증폭되도록 하였다는 주장을 펼치기도 하였는데, 원문을 다시 한 번 잘 살펴보기 바란다. 그것은 전혀 터무니 없는 주장임을 알게 된다.

 

(말 3:8) 『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것(엘로힘)을 도둑질하겠느냐 그러나 너희는 나의 것(에티)을 도둑질하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것을 도둑질하였나이까 하는도다 이는 곧 십일조와 봉헌물이라』

 

하나님의 것”은 “엘로힘”을 번역한 말로, “사람이 어찌 ‘하나님’을 도둑질하겠느냐?”인데, 이는 문구상 전혀 이상한 번역이 아니며, “나의 것”은 “에티”를 번역한 것인데 “에트(~을)+이(나의)”라는 말로서 “나의 것” 이것은 정확한 번역이며, “주의 것”이라는 말은 사실상 원문에 없으나 “우리가 어떻게 도둑질하였나이까?(히. 카바; 훔치다, 도둑질하다, 약탈하다) 이는 십일조와 봉헌물이라”는 구절이기에 해석상 “주의 것”이라는 보충어를 넣어주는 것이 전혀 이상한 것이 아니다.]

 

말3:13-18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들에게 임하는 복에 관한 약속이다.

 

말4:1-6은 여호와께서 정하신 날에 주어질 회복과 심판에 관한 이중적 예언의 선포다.

 

※ 말라기서를 이상과 같이 구구절절이 설명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서두에서 밝힌 것처럼 요즈음 십일조 시대는 지나갔으며, 말라기서는 십일조를 강조하는 책도 아니고, 더군다나 십일조를 복의 조건으로 인용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는 주장들이 여기저기에서 제기 되고 있는데, 그런 주장에 따르자면 말라기서는 제사를 잘 못 드리고 있는 제사장들에 대한 책망이기에 요즘 말로 하면 목회자들과 같은 종교 지도자들에 대한 책망이 주요 메시지이며, 백성들이 성전에 바쳐 하나님의 것이 된 십일조와 봉헌물을 제사장들이 도둑질했음을 책망하는 책이지 십일조를 강조하는 책이 아니라는 것이다. 거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십일조는 주로 미국의 근본주의 전통에 있는 신자들에게서 나왔고, 한국교회는 그 교회의 영향을 받아서 그런 전통을 세웠다는 비판을 서슴치 않는다.

 

그러나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십일조는 태초로부터 시작된 전 인류의 공통적인 유산이며, 말라기는 제사장들과 이스라엘 백성들 전체에게 주시는 경고와 촉구의 메시지이지 단지 제사장들의 제사행위만을 경고하는 메시지가 아님을 알아야 한다. 말라기 선지자를 통하여 선포되는 메시지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이 주시는 복된 삶, 풍성한 삶을 살아가는 원리에 관한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풍성한 복을 받으려면 제사장을 포함한 이스라엘 온 나라가 정직하게 십일조를 드려야 하는 것이며, 제사장들은 모든 십일조들을 창고(성전)에 잘 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결국 하나님이 주시는 부흥의 원리인 말3:8-12은 제사장과 백성들이 공동으로 뜻을 합하고 힘을 합하여 이루어야 할 일이며, 그와 같이 순종하여 하나님이 주시는 풍성한 복을 받아야 함을 강조하는 말씀인 것이다. 혹자가 말하는 것처럼 십일조가 성경적이지는 않지만 “지금까지 내려온 좋은 제도요, 전통인데 굳이 포기할 것까지 있을까?”의 차원도 아닌 것이다. 만약 어떤 것이 성경적으로 옳지 않은 것이라면 그것이 아무리 좋은 제도요, 유익을 주는 전통이라 할지라도 과감하게 포기해 버려야 할 것이라고 믿는다.

 

3. 성전이 파괴되었고 제사가 폐지되었기에 십일조도 폐지되었다?

 

아브라함이 한 십일조와 율법의 십일조가 다르다고 보는 이들도 있으나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왜냐하면 아브라함이 드렸던 십일조도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인 멜기세덱에게 드려진 것이었고(창14:18), 율법의 십일조도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던 제사장들의 사역을 위하여 드려진 것이기 때문이다(민18:21).

 

혹자는 “십일조가 성전이 파괴되었고 제사제도가 폐지된 오늘날의 교회에게도 여전히 유효한가?”라는 질문을 하기도 하는데, 물론 성전이 파괴되었고 제사제도가 폐지된 것은 사실이지만 십일조는 여전히 유효한 것이다. 왜냐하면 십일조는 성전을 위하여 낸 것이 아니라 그곳에서 사역하던 제사장들을 위하여 낸 것이었으며(민18:21), -성전의 유지와 보수를 위하여 내던 것은 십일조가 아니라 성전세였다(출38:24-31). -제사제도가 폐지됨으로 제사장들이 없어진 것은 사실이지만, 주님은 성도를 온전하게 하여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세우시려고 오늘날 교회 안에 사도, 선지자, 복음 전하는 자, 목사, 교사와 같은 목회의 오중사역자들을 세우셨으며(엡4:11-16), 그들의 사역을 위한 재정의 필요가 여전히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사도바울이 다음과 같이 말했던 것이다.

 

(고전 9:7-14) 『[7] 누가 자기 비용으로 군 복무를 하겠느냐 누가 포도를 심고 그 열매를 먹지 않겠느냐 누가 양 떼를 기르고 그 양 떼의 젖을 먹지 않겠느냐? [8] 내가 사람의 예대로 이것을 말하느냐 율법도 이것을 말하지 아니하느냐? [9] 모세의 율법에 곡식을 밟아 떠는 소에게 망을 씌우지 말라 기록하였으니 하나님께서 어찌 소들을 위하여 염려하심이냐? [10] 오로지 우리를 위하여 말씀하심이 아니냐 과연 우리를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 밭 가는 자는 소망을 가지고 갈며 곡식 떠는 자는 함께 얻을 소망을 가지고 떠는 것이라 [11] 우리가 너희에게 신령한 것을 뿌렸은즉 너희의 육적인 것을 거두기로 과하다 하겠느냐?... [13] 성전의 일을 하는 이들은 성전에서 나는 것을 먹으며 제단에서 섬기는 이들은 제단과 함께 나누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14] 이와 같이 주께서도 복음 전하는 자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명하셨느니라

 

엡 2:15에 “법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라는 구절을 인용하며, 십일조도 계명의 율법과 함께 폐하여졌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이 구절은 문맥상 할례(엡2:11) 혹은 예물과 제사를 위한 “육체의 예법(히9:9-10)”, 즉 율법의 “의식법”이 폐하여졌음을 말하는 것이지 율법의 도덕법 같은 것까지도 폐하여졌음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율법이 의식법은 폐하여졌으나 율법의 도덕법은 여전히 유효한 것처럼, 십일조도 폐하여진 것이 아니며 여전히 유효한 것임을 알아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십일조를 율법의 한 조항으로 보며 율법이 폐하여졌기에 십일조도 폐하여진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옳지 못한 것이라고 본다. 십일조는 의식법도 시민법도 도덕법도 아닌 하나님 백성 된 자의 당연한 의무이자 특권인 것이다. 목회자들과 같이 하나님의 사역을 감당하는 자들을 위하여 구별되는 하나님의 성물인 것이다. 다시 한 번 지적하거니와 십일조는 성전이 아닌 성전에서 일하는 사역자들을 위한 것이며, 성전의 유지와 보수를 위한 것은 성전세이지 십일조가 아니었다. 그러므로 복음사역을 위한 목회오중직이 존재하는 한 십일조는 여전히 유효한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또 혹자는 바울 사도가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진 물질을 “씨와 먹을 양식” 두 가지 용도로 나누어 말했기에(고후9:10), 가족들의 생활을 위하여 사용하는 물질 그 이상의 것은 의의 열매를 거두기 위하여 심어야 한다는 주장을 펼친다. 그러면서 먹을 것 이상의 물질은 의의 열매를 거두기 위하여 심어야 하기에, 십분의 일이라거나 십분의 이 또는 십분의 삼이라는 등의 물질에 비례하는 어떤 기준은 없으며, 먹을 것 이상의 물질은 씨로 받아들이고 의의 열매를 거두기 위하여 자원하여 즐거움으로 심는 것이 십일조의 완성이라는 주장을 펼친다. 하지만 사도바울이 말한 의도가 진정 그러한 것이었을까? 율법이 정하는 바 십의 일, 십의 이, 십의 삼도 못하는 사람들이 과연 먹을 것만 빼고 다 구제를 위하여 사용한다는 것이 가능한 일일까?

 

이즈음에서 더글라스 르블랑의 책 「십일조」에 나오는 랜디 알콘의 말을 인용해 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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랜디(Randy Alcorn)는 십일조가 율법주의라는 비난에 맞서 십일조를 옹호한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일부 그리스도인들이 십일조를 출발점이 아니라 청지지적 삶의 최고선(最高善)으로 보는 데 대해서는 안타까움을 표한다. 그는 말한다. “흔히 사람들은 십일조란 특별한 희생과 헌신의 행위이므로 훌륭한 성도들만이 실제로 10%를 드릴 거라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은 구약의 헌금과 신약의 헌금을 거론하는데, 가장 큰 착각 중 하나는 구약의 헌금은 십일조라는 의무적 헌금이고 신약의 헌금은 자원해서 드리는 자발적 헌금이라는 생각입니다. 하지만 자원해서 드리는 헌물은 구약에도 가득합니다.

 

“헌금을 한 푼도 하지 않으면서 십일조를 구약 시대에나 맞는 율법적인 일로 보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나는 그런 많은 사람들과 장시간 대화를 해보았습니다. 그들에게 십일조란 동물 제사를 드리는 것과 같고 경건하지 못한 일입니다. 당연히 그들은 주변을 둘러보며, 십일조에 율법적으로 빠진 사람들이 있다고 말합니다. 십일조에 율법적으로 빠진 사람들이 물론 있습니다. 그거라면 나 역시 전적으로 반대합니다.”

 

랜디는 하나님이 더 후히 드리는 삶을 원하시는 이유를 이렇게 설명한다.

 

“내가 늘 사람들에게 하는 말이 있습니다. 10%라는 기준은 하나님이 구약 시대 이스라엘의 가장 가난한 사람들에게 요구하신 수준입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예수님의 은혜 아래 있고, 내주하시는 성령을 모시고 있으며, 엄청나게 풍요로운 문화 속에 살고 있습니다. 그런 우리에게 하나님이 기대하시는 바가 그보다 적을 것 같습니까? 하나님은 신약 시대의 사람들에게도 여전히 기대를 품고 계실까요? 물론입니다. 사실, 예수님의 메시지는 ‘이전에는 어떻다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입니다. 그러고 나서 그분이 매번 하신 일이 무엇입니까? 기준을 더 높이셨습니다.

 

“사도행전 2장과 4장에 명백히 나와 있듯이 신약의 헌금은 너도나도 재산을 현금화 하여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는 것입니다. 10%보다 얼마나 더 많습니까? 그들은 기존의 재산을 팔아서 그 돈을 몽땅 다 드렸습니다. 소득의 100%가 아니라 재산의 100%를 드린 것입니다. 그들이 드린 액수를 요즘 돈으로 환산한다면 오늘 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평생 드리는 액수와 맞먹을 것입니다. 그나마 그렇게 드리는 그리스도인들이 많지 않지만 말입니다."

 

랜디는 십일조를 그리스도인의 헌금의 보조 바퀴라고 즐겨 부른다. 그는 말한다. “보조 바퀴를 다는 취지는 실제로 안장에 올라앉아 자전거 타는 법을 배우게 하는 데 있습니다. 내 생각에 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십일조는 아주 좋은 것일 수 있습니다. 훈련된 방법, 객관적이고 측정 가능한 방법으로 헌금이 길을 가게 한다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목표는 우리가 예수님의 은혜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신약 성경에서 헌금에 관한 가장 긴 본문인 고린도후서 8장과 9장을 보십시오. 그냥 그 본문을 공부하고 묵상해 보십시오, 이건 십일조와는 별개의 문제입니다. 우리가 정말 고린도후서 8장과 9장의 정신을 깨닫고 그대로 삶에 실천한다면 십일조는 잊어버려도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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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글라스 르블랑. 『십일조』. 윤종석옮김. (서울: IVP. 2011). pp.81-83.>

 

혹자는 이야기 한다. “율법이 폐하여졌기에 십일조도 폐하여 졌으며 신약의 교회에게 아브라함의 십일조, 율법의 십일조, 공생애 때에 예수님이 말씀하신 십일조를 요구하는 것은 죄악이다. 바울 사도가 그렇게도 강하게 거부한 다른 복음이다. 그 자리에 머물러 있는 신자는 사도바울의 경고를 마음에 새겨야 한다. 하늘에 있는 천사들이라도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 것이라(갈1:8-9)는 경고를 말이다.” 그러나 이상과 같은 말이 진짜로 맞는 말일까? 사도바울이 말한 다른 복음이 과연 그런 것을 말하는 것이었을까? 나는 아니라고 믿는다. 오히려 사도바울은 복음사역자들을 위한 재정의 필요를 역설하였다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고전9:7-14).

 

 

II. 오늘날 한국교회에 십일조가 율법적으로, 기복적으로, 주술적으로 행사되고 있는 것인가?

 

오늘날 한국교회에 십일조가 율법적으로, 기복적으로, 주술적으로 행사되고 있다는 주장을 펼치는 이들도 있으며, 하나님은 우리가 돈을 들고 와서 바치기를 원하지 않으시며, 더군다나 돈을 바치면서 그 대가로 복을 기대하는 것을 정말로 싫어하신다는 주장을 펼치는 이들도 있음을 본다.

 

그러나 정말로 그런 것일까?

 

오늘날 한국교회에 십일조가 율법적으로, 기복적으로, 주술적으로 행사되고 있는 것일까?

하나님은 우리가 돈을 들고 와서 바치기를 원하지 않으시며, 더군다나 돈을 바치면서 그 대가로 복을 기대하는 것을 정말로 싫어하시는 분이실까?

 

나는 전혀 그렇지 않다고 믿는다.

 

왜냐하면 성경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있기 때문이다.

 

(마 6:19-33) 『[19]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고 도둑질하느니라 [20] 오직 너희를 위하여(하나님을 위하여가 아님을 주목하라)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둑질도 못하느니라 [21]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 [24]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33]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 이 구절은 우리 자신을 위하여 하나님께(하늘에; 유대인들에게 하나님을 나타내는 대유법적 표현임) 보물(재물)을 투자하라는 말씀이며, 하나님께 투자하면 현세에서 여러 배로 갚아주신다는 말씀이다.

 

(고후 9:6-11) 『[6] 이것이 곧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둔다 하는 말이로다 [7]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 [8] 하나님이 능히 모든 은혜를 너희에게 넘치게 하시나니 이는 너희로 모든 일에 항상 모든 것이 넉넉하여 모든 착한 일을 넘치게 하게 하려 하심이라 [9] 기록된 바 그가 흩어 가난한 자들에게 주었으니 그의 의가 영원토록 있느니라 함과 같으니라 [10] 심는 자에게 씨와 먹을 양식을 주시는 이가 너희 심을 것을 주사 풍성하게 하시고 너희 의의 열매를 더하게 하시리니 [11] 너희가 모든 일에 넉넉하여 너그럽게 연보를 함은 그들이 우리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게 하는 것이라

 

(막 10:29-30) 『[29]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머니나 아버지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30] 현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식과 전토를 백 배나 받되 박해를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갈 6:6-7) 『[6] 가르침을 받는 자는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모든 좋은 것을 함께 하라 [7]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히 11:6)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눅 6:38)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

 

(눅 12:33-34) 『[33] 너희 소유를 팔아 구제하여 낡아지지 아니하는 배낭을 만들라 곧 하늘에 둔 바 다함이 없는 보물이니 거기는 도둑도 가까이 하는 일이 없고 좀도 먹는 일이 없느니라 [34] 너희 보물 있는 곳에는 너희 마음도 있으리라

 

(잠 22:4) 『겸손과 여호와를 경외함의 보상은 재물과 영광과 생명이니라

 

(잠 10:22) 『여호와께서 주시는 복은 사람을 부하게 하고 근심을 겸하여 주지 아니하시느니라』

 

(잠 11:24-25) 『[24] 흩어 구제하여도 더욱 부하게 되는 일이 있나니 과도히 아껴도 가난하게 될 뿐이니라 [25] 구제를 좋아하는 자는 풍족하여질 것이요 남을 윤택하게 하는 자는 자기도 윤택하여지리라』

 

(잠 28:8) 『중한 변리로 자기 재산을 늘이는 것은 가난한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자를 위해 그 재산을 저축하는 것이니라』

 

(말 3:9-12) 『[9] 너희 곧 온 나라가 나의 것을 도둑질하였으므로 너희가 저주를 받았느니라 [10]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부족함이 없도록/직역) 붓지 아니하나 보라 [11]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메뚜기를 금하여 너희 토지소산을 먹어 없애지 못하게 하며 너희 밭의 포도나무 열매가 기한 전에 떨어지지 않게 하리니 [12] 너희 땅이 아름다워지므로 모든 이방인들이 너희를 복되다 하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마 23:23)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히 7:8) 『또 여기는 죽을 자들이 십분의 일을 받으나 저기는 산다고 증거를 얻은 자가 받았느니라』

 

※ 히브리서는 주후 65년경에 쓰여졌다. 이 구절은 그 때에도 초대교회가 여전히 십일조를 순종하고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는 기록이다.

 

(신 14:22-15:6) 『[22] 너는 마땅히 매 년 토지소산의 십일조를 드릴 것이며... [28] 매 삼 년 끝에 그 해 소산의 십분의 일을 다 내어 네 성읍에 저축하여 [29] 너희 중에 분깃이나 기업이 없는 레위인과 네 성중에 거류하는 객과 및 고아와 과부들이 와서 먹고 배부르게 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손으로 하는 범사에 네게 복을 주시리라... 15:[4] 네가 만일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만 듣고 내가 오늘 네게 내리는 그 명령을 다 지켜 행하면 [5]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신 땅에서 네가 반드시 복을 받으리니 너희 중에 가난한 자가 없으리라 [6]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허락하신 대로 네게 복을 주시리니 네가 여러 나라에 꾸어 줄지라도 너는 꾸지 아니하겠고 네가 여러 나라를 통치할지라도 너는 통치를 당하지 아니하리라』

 

(민 18:21-24) 『[21] 내가 이스라엘의 십일조를 레위 자손에게 기업으로 다 주어서 그들이 하는 일 곧 회막에서 하는 일을 갚나니 [22] 이 후로는 이스라엘 자손이 회막에 가까이 하지 말 것이라 죄값으로 죽을까 하노라 [23] 그러나 레위인은 회막에서 봉사하며 자기들의 죄를 담당할 것이요 이스라엘 자손 중에는 기업이 없을 것이니 이는 너희 대대에 영원한 율례라 [24]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거제로 드리는 십일조를 레위인에게 기업으로 주었으므로 내가 그들에 대하여 말하기를 이스라엘 자손 중에 기업이 없을 것이라 하였노라』

 

(고전 9:7-14) 『[7] 누가 자기 비용으로 군 복무를 하겠느냐 누가 포도를 심고 그 열매를 먹지 않겠느냐 누가 양 떼를 기르고 그 양 떼의 젖을 먹지 않겠느냐? [11] 우리가 너희에게 신령한 것을 뿌렸은즉 너희의 육적인 것을 거두기로 과하다 하겠느냐? [13] 성전의 일을 하는 이들은 성전에서 나는 것을 먹으며 제단에서 섬기는 이들은 제단과 함께 나누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14] 이와 같이 주께서도 복음 전하는 자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명하셨느니라

 

(시 126:5-6) 『[5]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6]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반드시 기쁨으로 그 곡식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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